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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기 소개
차승현 (2001. 05. 15)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생각과 그에 대한 고민을 다룬다.
작업 소개문
작품의 전반적인 주제는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통제하거나 이해할 수 없어서 느껴지는 원초적인 두려움과
그것을 통제하는 방법론으로 자연을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이미지화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특정 방식 때문이다.
그 특정 방식이라 하면, 인간은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을 이해하려면 자신이 이해 가능한 체계나 논리로
재단해야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고 대상을 이해한다.
본인이 세상을 조정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인간 중심주의 사고인 것이다.
그에 반해, 자연은 인간이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며
그곳에서부터 오는 불안이 해소되지 않는 두려움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근대화의 과정과 이후 자연을 도구, 소모품화하여 효율, 통제를 추구하고 안전과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스스로 세계를 관찰하고 조작할 수 있는 이성적 주체로 규정하여 불안을 상쇄하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모든 인간이 그렇다기보다는 근대화 이후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패턴이며 여러 방식으로 드러난다.
아래는 그 방증이다.
현상적으로 공원, 식물원, 인공폭포 등 대부분의 '자연스럽다.'라고 표현하는 공간은 설계되고 통제 되어있다.
자연의 예측 불가능성을 제거하고 감각적 쾌를 위해 조작한 것이다.
언어적으로 자연을 보존, 관리, 활용이라는 표현으로 다루는 언어 구조 자체가 이미 자연을 대상화하고 있으며,
이는 자연과 인간이 수평적 관계가 아님을 전제한다.
역사적으로 산업혁명 이후의 도시계획, 농업, 생태 복원, 기후 정책 등 자연을 회복하려는 시도 또한 설계를 통한 인공적인 조정이다.
철학적적으로 서구 근대 철학은 인간-자연의 이분법을 정립하며, 인간을 이성적 주체로, 자연을 비이성적 객체로 규정지었다.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자연은 늘 조작 가능한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고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은 산업 혁명과 같은 급진적인 과학적 발전과
문명의 고도화를 이뤄내어 인간 사회의 안정성과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으나,
그 대가로 인간도 마찬가지로 스스로에게 통제와 효율을 중시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자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강에 댐을 짓고, 숲을 경작지로 만들면서 얼마나 효율적인지가 중요한 가치가 된 것처럼,
"나는 이 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얼마나 효율적이고 유용하며 생산적인가?" 가 '나'로써의 존재가치를 대체했다.
굶주림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살아야 한다는 가장 강하고 주체적인 욕망의 원동력이 된다.
이것은 외부적 요인이 아닌, 나의 생명 자체에서 발현된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 특히 효율성 논리가 지배적인 '이것이 상식이고 진리다'라고 믿게 만드는 아주 강한 체계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사회에서의 행복은 주체적인 과정보다는 결과에 있다.
좋은 학벌, 집, 차 등등 체계가 정해놓은 결과물을 획득해야 행복하다고 규정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을 비용이나 고통으로만 인내하게 되고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과정의 가치는 퇴색되며 결과라는 정해진 목표만이 행복의 척도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결과물들은 내가 원해서 설정한 목표가 아닌, 사회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외부가 제시한
표준화된 보상들이다. 우리는 이 보상들 중 무엇을 가질지 선택할 수는 있지만
이런 사회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남들처럼 혹은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주어진 보상들을 획득하는 것을
성공이자 행복이라고 부르도록 강요받는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사육하는 가축처럼, 인간은 스스로 우리에 갇혀 생활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추상적 개념을 이미지화하였다.
작품의 전체적인 형태는 분재의 형상을 띄고 있는데, 분재는 인간의 관점에서 아름답고 가치 있도록 재단한
많은 사례들 중 하나이며, 자연을 원하는 대로 통제하는 인간의 행동을 의미한다.
작품 최상단의 거칠게 깎인 나무가 드러난 부분은 통제하려는 시도의 흔적과 완벽히 통제하지 못한 자연을 은유한다.
반듯하게 잘리고 형형색색으로 채색되어있는 나무 블록들은 인간중심주의 관점에서 재단된 것들을 표현하였으며,
최하단에 놓여있는 부식된 철 구조물은 자연을 통제하는 문명화의 기반과 그로 인한 부작용 즉,
인간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있는 우리와 그 기반 또한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안정성과 풍요를 위해 치른 대가는 삶의 가치를 효율과 수치라는 잣대로 정의하도록 강요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모호하지만 주체적이고 본질적인 행복, 관계, 의미 같은 가치들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설계한 측정 가능한 보상으로 대체하였고 그것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행복이 아닌, 시스템의 부품으로써 효율적으로 작동했을 때 주어지는 보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보상을 나의 행복이라고 믿도록 우리 속의 가축처럼 길들여진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연을 우리와 분리된 자원처럼 보는 관점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
우리는 효율성과 통제라는 색안경을 쓰고 자연을 바라보고 있다.
자연을 마치 마트에서 쇼핑하듯 필요한 게 있으면 꺼내 쓰는 자원처럼 보고 있지만
그렇게 물건처럼 돈을 내고 사면 끝이 아닌 대가가 따른다.
그 예로 편하자고 쓴 플라스틱은 완벽히 분해되지 않고 미세 플라스틱이 되어 물에 녹아들고
그 물은 비가 되어 내리고 우리가 마시기도 하며 그 물을 먹이고 그 물이 스며든 땅에서 키운 농작물, 그 농작물을 먹여 키운 가축을 소비한다.
그렇게 거의 모든 먹이사슬과 생태계에 미세 플라스틱이 퍼져 이제는 새로 태어난 신생아의 몸속에서 마저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되는 되돌릴 수 없는 수준의 오염을 불러일으켰다.
자연은 순환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술이 발전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믿지만 자연은 한계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지금 자연을 소비하는 방식은 통장 잔고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도 안 하고 신용카드를 긁어대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자연을 소비한다는 것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신의 집을 갉아먹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자연을 더 효율적으로 통제할까? "가 아닌
"어떻게 하면 자연과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공존하는 파트너로서 관계 맺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